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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이야기 - 독도 수호의 역사와 인물①
2019년 05월 10일 (금) 11:29:31

   

변우택 이사장 / 사단법인 주거환경연합

독도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당연히 우리나라 영토라고 우리는 마땅히 주장하지만 간교한 일본은 그런 우리의 주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교묘한 국토 침탈행위를 1905년 이래 계속 행하고 있다.

사단법인 주거환경연합 변우택 이사장은 1980년 독도경비대로 근무하며 독도와의 인연을 맺은 뒤 현재까지 다양한 독도의 사진을 비롯해 독도와 관련한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독도 시집을 발간하는 등 말 그대로 ‘독도지킴이’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에 주거환경신문에서는 변우택 이사장이 정리한 독도 관련 자료들을 지면이 허락하는 대로 연재할 예정이다.

이번호에서는 그 첫 순서로 독도를 호시탐탐 노리며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는 일본의 행동에 대처하여 독도를 지킨 사람들 중 대표적인 인물들의 자료를 모아 소개한다.

변우택 이사장은 “독도를 사랑하는 사람들 나아가서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이 독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국심을 가지고 ‘독도사랑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자료를 수집 정리했다”고 밝혔다.

 

∥신라장군 이사부(異斯夫)

독도와 관련하여 역사상 첫 기록으로 등장한 인물은 내물왕의 4대손인 신라장군 이사부로 지증왕 6년(서기 505년)삼척의 군주가 되었다가 동왕13년 하슬라주(현재의 강릉)의 군주로 있을 때 우산국을 정복하였다. 당시 울릉도는 우산국으로 신라와는 별개의 독립적인 부족국가 형태를 이루며 바다를 터전으로 살고 있었다. 이사부는 나무로 허수아비사자를 만들어서 배에 싣고 우산국에 이른 후“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사자들을 풀어 죽게 하리라.”하고 위협하니 우산국 사람들은 순순히 항복하고 매년 신라에 조공을 바치기로 하였다. 그 후 이사부는 진흥왕 2년(서기 541년) 신라의 관직 중 2번째 등급인 이찬이 되었고 국사편찬의 필요성을 왕에게 진언하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독도 명칭의 변화>

∥외교가 안용복(安龍福)

조선후기에 활약한 민간외교가 안용복에 대해서는 출생지나 출생년도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아 자료를 통해 추측하는 정도이다. 일본 돗토리현의 18세기 역사가 오카지마의「죽도고」라는 사료의「오타니가 선인(船人)에 의한 조선인 연행」이라는 독립된 장에는 안용복의 1차 도항에 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1687년까지 안용복의 거주지인 부산 좌천동과 수정동에는「두무포왜관」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우리나라는 동래상인만이 일본의 대마도 사람과의 무역을 허용했으며 이들이 무역을 할 수 있도록 1609년 부산 두무포에 왜관을 지었다. 여기에서 안용복이 일본말을 배워 일본 관리들과 담판을 할 수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1694년(숙종20년) 영의정 남구만은 1차 회답서를 고쳐서 "울릉도가 죽도로서 1도 2명임을 명확히 하고, 일본인들이 조선영토에 들어와 안용복 일행을 데려간 것은 실책"이라고 하였다.

1696년(숙종 22년) 조선과 일본의 논쟁이 계속 되고 대마도주가 집요하게 울릉도를 탈취하려는 것을 보고 안용복 일행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담판하기로 결심하고 봄에 울릉도로 갔다. 울릉도, 독도에서 다시 일본인을 접한 안용복 일행은 그들을 꾸짖고 일본 어부들을 쫓아 일본 오키도에 도착하였다.

일본 막부의 외교문서를 정리해 놓은 '통행일람'에 의하면 이 시기는 막부에 의해 '울릉도 도해금지령'이 내려진(1696년 1월 28일) 직후였다. 일본측 문헌(죽도고)에 의하면 당시 안용복 일행은 배에 '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라는 대형깃발을 달고 있었으며 '정삼품 당상관'이라는 관직을 안용복이 사칭했던 것으로 미루어 조선사절임을 위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키도에 도착한 안용복은 스스로를「울릉,우산 양도의 감세장」이라 칭하고 돗토리번(백기주) 번주와 면담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측 자료 '인부연표(1696년 6월 4일)'에 의하면 "죽도에 도해한 조선의 배 32척을 대표하는 사선 1척이 백기주에 직소를 위해 들어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안용복은 돗또리번에서 돗또리번(백기주) 태수와 면담을 하여 "전날 양도의 일로 서계를 받았음이 명백한데도 대마도주는 서계를 탈취 하고 중간에 위조하여 여러번 차왜(사절)을 보내서 불법으로 횡침하니 내가 관백(막부)에게 상소하여 죄상을 낱낱이 진술하겠다"고 따졌다.(숙종실록) 당시 안용복은「푸른 철릭을 입고 검은 포립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 교자를 타고」번청에 들어갔던 것으로 조선 측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1696년 1월, 대마도의 새로운 도주 '종의방'은 신임 인사를 겸하여 강호의 덕천막부 장군에게 입관했다가 백기주 태수 등 4인이 있는 자리에서 관백으로부터 '竹島一件'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된다. 이 자리에서 대마도주는 사실에 근거한 답변을 하게 되고 덕천막부는 "영구히 일본인이 가서 어채함을 불허 한다"라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일본측 문헌, 공문록)

이러한 막부의 결정은 대마도의 '영유권 강탈 야욕'으로 발생한 조선과 일본 간의 울릉도 및독도 영유권 논쟁을 종결시키게 되었으며 막부의 결정은 한편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하고 결정하는 획기적인 문서로 받아들여진다.(신용하 교수)

안용복의 2차례에 걸친 일본 도해 활동은 조선 태종(1416년)이래 왜구들의 잦은 침입으로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자 실시한 ‘울릉도 및 독도 공도정책’으로 방치되어(조선 조정은 정기적으로 관리를 파견하였음) 있던 울릉도 및독도를 일본의 영토침탈야욕으로부터 지켜내고 일본의 최고 권력기관으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받는 획기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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