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가 끝난 빈들에 서서 농부는 한 해 농사를 생각한다. 그리고 내년살이를 그려본다. 눈을 들어 빈들을 보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부끄러운 모습들을 떠올리며 새로운 많은 것을 깨닫는다.

주민들의 입주로 분주한 아파트 단지 광장에 선 어느 조합장의 눈빛은 한 해 농사를 끝낸 농부의 것과 유사하였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에게는 내년의 농사지을 땅이 없이 새로운 일터를 찾아 나서야 하는 걱정이 있었다. 7년여의 기나긴 시간이었다. 주변의 어느 조합장은 업무과로로 병원에 입원하더니 그 길로 유명을 달리하였고, 어느 단지의 조합장은 재건축사업과는 무관하였던 철거민단체 회원들의 과도한 방문(?)을 받아 급기야 병원에 입원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사업초기 조합장으로 선출될 때에는 마치 자신이 아니면 조합을 이끌어갈 사람이 없는 것처럼 자신을 뽑아주었던 주민들 사이에서 어느 단계에서부터인가 이상한 소리들이 흘러 다니며, 자신을 마치 도둑취급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시공사로부터 집을 약속 받았다’ ‘철거업체로부터 얼마를 받았다’ ‘어느 업체 관계자와 모처에서 식사하는 것을 보았다’는 등등. 어디 그뿐인가? 세상에서 가장 무식하고 못된 사람이 바로 자신 조합장이다. 적어도 조합원들 사이에선 그러하다. 사정이 그러하다보니 사회적으로 냉대 아닌 천대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식들이 직업을 밝히기를 꺼려한다. 이러한 일로 수 차례 사의를 밝힌 적도 있었지만 번번이 조합원들의 거절로 좌절되었었고, 난무하고 있는 온갖 유언비어와 음해로부터 당당히 맞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단체에서 지난 2000년 3월에 실시한 실태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전국의 재건축조합의 조합장의 평균연령은 55세, 평균 월 급여는 180만원대로 집계되었다. 실태조사 이후 2년여 시간의 경과로 변동이 있을 수 있을 것이나 그 폭은 미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선 재건축조합의 조합원들이 조합 상근자들이나 임원진들의 근무환경이나 근로조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은 2년 전에 비해 별반 나아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지난 10월29일에 개원 10주년을 맞아 ‘서울시 사회계층과 정책수요’ 연구를 위해 만 20살 이상 65살 이하의 서울시민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평균적인 서울시민의 모습은 ‘26평형 아파트에 사는 4인 가족의 38살의 남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평균적인 서울시민의 모습을 가진 이의 월 평균소득은 281만원으로, 이 가운데 생활비로 169만원을 쓰고 84만원을 저축하고 있다고 한다. 또 가구당 평균부동산은 1억2000만원, 금융자산은 4100만원이며, 31평형 아파트로 이사를 꿈꾸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한다.

이상에서 서술한 평균적인 서울시민의 모습에 비추어 본다면 일선의 재건축조합 관계자들의 생활상은 매우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보통의 시민들에게 있어 50대이면 성장한 자녀들의 학업이 대학생이거나 그리 머지 않은 시일 안에 자녀들의 출가계획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노후 또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시기일 것이다.

성공적인 조합업무 수행 이후 또 다른 어떤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연령 및 취업난 등의 우리 사회의 구조상에 비추어 볼 때 거의 불가능한 일 일 것이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도 조합의 상근자 및 임원진들에 대한 조합원들의 정당한 보수는 요원하기만 하다. 게다가 사회적 인식 또한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부정적인 사회적 인식과 조합원들의 인색함만을 탓할 수는 없다.

여기서 필자는 일하는 자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치러질 수 있는 재건축사업 문화 정착을 위한 하나의 제언을 드리고자 한다. 우선 일차적으로 재건축사업의 특성에서 비롯될 수 있는 온갖 의혹으로부터 조합집행부의 투명성 제고를 위한 노력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조합에 대한 조합원들의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일생을 들어 모아온 조합원의 토지 및 주택을 출자해 설립된 재건축조합에서 실질적 주인은 조합원들 자신이다. 일반의 주식회사 또한 주식을 소유한 주주들이 주인이다. 그 주인들은 자신의 재산 및 권리 신장을 위해 부단히 그 회사에 관심을 가지고 경제 일반을 비롯 국제정세에 이르는 분석과 종합을 통해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한다.

그런데 재건축조합의 실정은 그렇지 않다. 평생을 들인 재산을 조합집행부에 위탁해 놓은 채 무관심으로 일관하다가 문제가 발생해서야 나서는 게 일반의 모습이다. 주식회사에선 첨단 경영을 통한 이윤의 극대화라는 차원에서 전문경영인(CEO)등의 영입 및 기술혁신 등을 꾀한다. 적게는 수백 억 원에서 수 조 원에 이르는 재건축사업의 규모는 어느 중소기업 못지 않다. 조합집행부의 어느 기업 전문경영인에 못지않는 위상과 역할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요인이다.

이처럼 중요한 조합집행부가 타락한다면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우리 조합원들이 출자한 재산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합집행부가 자신의 막중한 임무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여건조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들이 그들의 양심에 어긋날 수 없는 그리고 우리 조합원들의 재산을 지키고 증식함으로써 크나큰 보람을 가질 수 있는 정당한 배려에 대해 신중히 고려하여 조합원 전체의 총의를 모아 실행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관계 당국은 관찰자적 자세를 버려야 한다. 물론 관계당국의 이러한 자세에는 근본적으로 사유재산권의 행사 및 개인의 행복권 추구라는 헌법적 차원의 권리보장이라는 요인이 있음을 이해한다. 그러나 개인사업자 등록을 할 수밖에 없는 현행 관련 법규상의 조합제도는 분명 정부당국의 조합에 대한 인식의 수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노후 불량한 주택 및 지역의 개선을 통한 주거환경 및 주거수준의 향상이라는 공익적 사업을 펼치고 있는 주민들의 대표들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인권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뒷받침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오늘의 열악한 재건축사업문화의 개선을 위해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지금 빈들에 서서 의심이 많은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빈들은 우리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는데, 우리는 그동안 의심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불안하게 살았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믿고 내놓음으로 다시 채우는 빈들처럼 의심을 지우고 믿음의 색깔이 충만한 우리들의 문화를 만들도록 해야 할 것이다.

최태수 / 재건련 기조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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